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는 과정은 서구에서 아시아로 중심을 옮기는 차원을 넘어선다. 특정 주체가 다른 지역의 미술을 분류하고 평가해 온 구조를 바꾸고, 다양한 역사와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가치와 기준을 만들어가는 일이다. 서구 미술사의 성취를 세계의 공동 자산으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이를 유일한 판단 기준으로 삼지 않는 새로운 지식 체계가 필요하다.
 
한국 동시대미술의 미래 또한 더 많은 작가를 해외에 소개하는 성과를 넘어선다. 작품을 창작하고 작가를 발굴·지원하는 단계에서 나아가 담론·전시·비평·아카이브·시장·교육이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미술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포스트 컨템퍼러리라는 새로운 조건
 
포스트 컨템퍼러리는 세계 동시대미술을 조직해 온 중심과 주변, 서구와 비서구, 보편과 지역의 관계가 재편되는 오늘의 조건을 설명하는 분석 개념이다. 컨템퍼러리 아트 이후의 특정 양식이나 미술운동이 아니라 변화하는 세계 미술의 구조와 권력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개념이다.
 
컨템퍼러리 아트는 다양한 지역과 문화, 정체성을 수용하며 미술의 영역을 넓혀왔다. 그럼에도 작품의 의미를 해석하고 미술사적 가치를 부여하는 권한은 여전히 일부 서구 미술관과 비엔날레 조직, 갤러리, 미술대학, 출판기관과 미술매체에 집중되어 있다.
 
아시아가 이미 형성된 담론 안에서 선택되고 설명되는 위치를 벗어나려면 세계 동시대미술의 개념과 방향을 함께 만들어야 한다. 포스트 컨템퍼러리의 핵심은 다양성의 확대를 넘어 의미와 기준을 생산하는 권한을 재구성하는 것에 있다.
 
 
 
‘해외 진출’에서 ‘세계 미술의 생산지’로
 
한국 미술계는 오랫동안 해외 전시, 국제 아트페어와 비엔날레 참여, 해외 갤러리 진출을 국제화의 주요 성과로 평가해왔다. 이러한 활동은 국제 미술계와의 접점을 넓히고 한국 미술의 가시성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앞으로는 해외 전시의 횟수와 규모뿐만 아니라 그 활동이 어떤 기록과 연구, 비평적 성과를 남겼는가를 함께 살펴야 한다. 전시 관련 자료와 작품 정보가 체계적으로 축적되어야 그 성과가 후속 연구와 전시로 이어질 수 있다.
 
한국 동시대미술의 세계화는 한국에서 새로운 의제와 지식이 형성되고, 그 성과가 세계 미술계에서 인용되고 활용되는 기반을 구축하는 과정이다. 한국 미술계는 작품을 세계에 소개하는 역할과 함께 세계 미술의 생산자·발행자·연결자·기준 제안자가 되어야 한다.
 
 
 
한국 동시대미술의 언어
 
세계 미술계에서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확보하려면 한국의 역사와 사회적 경험에서 출발해 세계가 공유하는 동시대적 의제로 확장되는 비평 언어가 필요하다.
 
한국의 근대화와 산업화, 분단과 냉전, 민주화, 압축성장, 도시화, 디지털 전환은 한국 사회의 특수한 경험인 동시에 세계 여러 지역이 함께 경험해온 변화와 연결된다.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단색화, 전통성, 수행성, 동양적 정신과 같은 제한된 범주 안에서 반복적으로 설명할 경우 작품의 복합성과 현재성이 충분히 드러나기 어렵다.
 
한국의 역사와 사회에서 형성된 경험을 세계가 함께 논의할 수 있는 개념과 의제로 확장하려면 연구자와 비평가, 큐레이터, 번역가, 편집자와 출판기관의 지속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작가론과 전시론, 미술사 연구가 정확하고 수준 높은 영문 자료로 축적되어 세계 어디에서든 검색되고 인용될 수 있어야 한다.
 
 
 
기록과 아카이브의 구축
 
작가와 작품의 미술사적 위치는 작품을 둘러싼 전시와 비평, 연구, 거래, 소장과 보존의 기록이 연결될 때 형성된다.
 
현재 한국 작가들의 자료는 작가 개인과 갤러리, 미술관, 언론, 여러 온라인 공간에 분산되어 있다. 작품 제목과 제작연도, 재료, 크기, 전시 이력과 소장처를 표기하는 방식도 서로 다르다. 상당수 주요 작가도 작품세계와 활동 전반을 확인할 수 있는 체계적인 자료와 신뢰할 만한 영문 정보가 충분히 구축되어 있지 않다.
 
작가 아카이브는 과거의 자료를 보관하는 기능을 넘어 미래의 연구와 전시, 출판, 작품 감정과 미술시장의 신뢰를 뒷받침하는 기반이다. 작품 정보의 표준화, 전시 기록의 디지털화, 이미지 저작권 관리, 비평문과 작가론의 축적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국제적 가시성은 발견의 계기를 만들고, 국제적 참조 가능성은 미술사적 지속성을 만든다.
 
 
 
미술기관과 시장의 역할
 
국공립미술관과 대학, 비영리기관은 전시를 개최하는 공간을 넘어 지식을 생산하고 축적하는 기관으로 기능해야 한다. 국제전과 해외 초청의 성과가 연구와 출판, 번역과 아카이빙으로 이어질 때 개별 행사는 한국 동시대미술의 장기적인 기반이 된다.
 
국공립미술관은 주요 작가와 작품에 관한 연구자료를 체계적으로 구축하고 국내외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개방해야 한다. 대학과 연구기관은 한국 동시대미술을 국제적 담론과 연결하는 장기 연구를 수행하고, 비영리기관과 민간 플랫폼은 제도권에서 충분히 조명하지 못한 작가와 자료를 발굴할 수 있다.
 
미술시장의 신뢰 역시 정확한 기록과 평가에서 형성된다. 갤러리는 작가의 경력과 작품 자료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경매회사와 시장 관계자들은 작품의 진위와 출처, 거래 이력을 확인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미술관과 연구기관이 축적한 미술사적 평가와 투명한 거래 정보가 연결될 때 작품의 가치도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있다.
 
 
 
국가 차원의 공공 플랫폼
 
한국에서 생산되는 미술정보와 연구자료를 체계적으로 연결해 국내외에 공유할 수 있는 공공 플랫폼이 필요하다.
 
이 플랫폼은 전시 일정과 뉴스를 전달하는 기능을 넘어 작가별 작품과 전시, 비평, 출판, 소장 이력과 활동 기록을 국제적 기준에 맞게 축적해야 한다. 국문과 영문을 기본으로 작가와 작품 정보의 표준을 마련하고, 지속적인 업데이트와 정보 검증, 저작권 관리가 이루어져야 한다.
 
공통된 공공 표준을 기반으로 미술관·대학·갤러리·민간 플랫폼의 자료가 서로 연동되는 개방형 구조가 적합하다. 각 기관이 자료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유지하면서도 전체 정보가 하나의 지식 체계로 연결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해외 미술전문가들이 한국 동시대미술의 주요 움직임을 확인하고 필요한 작가와 자료에 직접 접근할 수 있다.
 
국내에서 구축되고 있는 미디어·아카이브·작가 연결 플랫폼들도 이러한 필요에서 출발하고 있다. 앞으로는 개별 민간 플랫폼의 노력과 함께 국공립기관, 대학, 미술관, 갤러리와 작가가 참여하는 국가적 협력 체계로 확장되어야 한다.
 
 
 
누가 세계 미술의 미래를 만드는가
 
오리엔탈리즘을 둘러싼 논의는 누가 바라보고 설명하며 가치를 결정하는가라는 권력의 작동 방식과 연결된다. 한국 동시대미술의 미래는 서구의 왕좌를 대신 차지하는 데 있지 않다. 서로 다른 역사와 경험이 동등하게 세계 미술의 기준과 방향을 만들어가는 질서를 구축하는 데 있다.
 
 
한국 동시대미술이 세계 미술의 주요 생산지가 된다는 것은 한국 미술을 세계에 알리는 차원을 넘어선다. 세계 동시대미술의 주요 작가와 의제가 한국에서 연구되고, 새로운 담론과 전시가 한국에서 기획되며, 그 성과가 다시 세계 미술계에서 인용되고 활용되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오리엔탈리즘 이후 한국 동시대미술이 설계해야 할 포스트 컨템퍼러리의 조건이다.

김종호는 홍익대 예술학과 졸업 및 동대학원에서 예술기획을 전공하였다. 1996-2006년까지 갤러리서미 큐레이터, 카이스갤러리 기획실장, 아트센터나비 학예연구팀장, 갤러리현대 디렉터, 가나뉴욕 큐레이터로 일하였고, 2008-2017까지 두산갤러리 서울 & 뉴욕, 두산레지던시 뉴욕의 총괄 디렉터로서 뉴욕에서 일하며 한국 동시대 작가들을 현지에 소개하였다.

2017년 귀국 후 아트 컨설턴트로서 미술교육과 컬렉션 컨설팅 및 각 종 아트 프로젝트를 진행하였으며 2021년 에이프로젝트 컴퍼니 설립 후 한국 동시대 미술의 세계진출을 위한 플랫폼 K-ARTNOW.COM과 K-ARTIST.COM 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