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글로벌 스탠더드(I)」에서는 세계 동시대미술의 형식과 제도, 담론과 유통 구조를 ‘형식의 세계화와 내용의 지역화’라는 관점에서 검토했다. 「글로벌 스탠더드(II)」에서는 국제적 참여의 확대가 미술적 표현과 가치 판단의 표준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문제를 살펴봤다.
마지막 편에서는 이러한 논의를 한국 동시대미술의 현실로 가져오고자 한다.
한국 작가들의 해외 진출이 확대되고 국제적인 갤러리와 아트페어가 서울에 진출했으며, 한국미술에 대한 해외 미술관과 연구기관의 관심도 높아졌다. 그러나
이러한 국제화가 한국미술의 독자적인 미학과 담론, 연구와 평가 역량의 발전으로 얼마나 연결되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세계 미술의 다극화와 한국의 위치
세계 동시대미술은 더 이상 뉴욕과 런던, 파리 등 서구의 주요 도시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홍콩과 서울, 싱가포르 등 아시아의 미술도시들이
국제 미술시장의 거점으로 성장했으며, 중동에서도 새로운 미술관과 문화기관을 통해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그러나 미술시장의 지리적 확대가 곧 미술적 권력의 분산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주요
미술관과 비엔날레, 메가갤러리, 미술대학과 비평·출판 네트워크는 여전히 국제 미술계의 가치 판단과 담론 형성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아시아의 주요 미술도시들도 서로 다른 조건 속에서 발전해 왔다. 홍콩은
국제 미술거래의 거점으로, 일본은 오랜 미술관과 갤러리의 기반을 중심으로, 싱가포르는 동남아시아와 국제 미술계를 연결하는 네트워크를 통해 성장했다. 한국
역시 작가들의 창작 활동과 미술관, 비엔날레, 갤러리의 기반
위에서 국제적 교류를 확대해 왔다.
정체성 정치, 탈식민주의, 생태, 이주와 디아스포라 등의 담론은 비서구 지역의 역사와 경험을 가시화하는 데 기여했지만, 국제 전시의 반복적인 선정 기준으로 작동하면서 서로 다른 지역의 미술을 유사한 주제와 형식으로 설명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한국미술 역시 이러한 담론을 수용하는 데 머물지 않고, 독자적인 미술적
실천을 통해 기존의 해석과 표현 방식을 확장할 수 있어야 한다.
작품의 생산에서 미학과 담론의 생산으로
단색화와 한국 실험미술에 대한 해외의 재평가, 한국 작가들의 국제
비엔날레 참여와 주요 미술관 전시는 한국미술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국제 미술계에서 인정받는 주제와 형식을 활용하는 것과 새로운 미학을 생산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한국의 식민지 경험과 전쟁, 분단과 민주화, 압축적 산업화와 도시화, 디지털 기술의 확산 등은 새로운 미술적
실천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경험을 작품의 소재로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재료와 구성, 시간과 공간, 관객과의
관계 등 미술적 형식 자체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이다.
새로운 미학은 개별 작가의 독자적인 실천에서 형성되며, 비평과 연구를
통해 새로운 개념과 담론으로 발전할 수 있다.
한국 미술계에서는 전시와 작가를 소개하는 글이 지속적으로 생산되고 있지만, 전시
서문과 보도자료를 바탕으로 한 기사와 독립적인 미술비평은 구분되어야 한다. 작품의 개념을 전달하는 것과
실제 미학적 성취와 한계를 분석하는 것은 다른 전문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비평과 연구는 국제적인 미술이론을 활용하면서도 구체적인 작품과 실천에서 출발해 기존의 개념을 재검토하고
새로운 해석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미술의 독자적인 평가 역량은 이미 인정받은
가치를 설명하는 데서가 아니라, 아직 충분히 평가되지 않은 미술적 가치를 발견하고 검증하는 과정에서
형성된다.
미술관과 비엔날레는 무엇을 생산하는가
한국에는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한 여러 공공·사립미술관과 광주비엔날레, 부산비엔날레 등 국제적인 미술행사가 운영되고 있다.
미술관은 전시를 개최하는 공간인 동시에 작품을 수집·보존하고 미술사를
연구하는 기관이다. 따라서 성과는 관람객 수와 전시 규모뿐 아니라 소장품 연구, 학술 출판, 작가 연구와 새로운 미술사적 해석을 통해서도 평가되어야
한다.
비엔날레 역시 매회 새로운 주제를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시에서
제기된 질문이 이후의 연구와 비평, 다른 지역의 미술적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전시의 기록과 평가가 지속적으로 축적되어야 한다.
한국의 미술관과 비엔날레는 세계 미술의 흐름을
소개하는 기능과 함께, 새로운 미학적 질문과 미술사적 해석을 생산하는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미술시장과 아카이브, 가치 형성의 기반
한국 미술시장은 국제적인 갤러리와 아트페어의 진출, 국내 갤러리의
해외 활동과 컬렉터층의 확대를 통해 변화해 왔다. 특히 프리즈 서울은 한국이 국제 미술시장의 주요 교류
거점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해외 갤러리의 진출과 고가 작품의 거래가 국내 미술생태계의 성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국제적인 주요 갤러리들은 작품 판매뿐 아니라 작가의 장기적인 활동, 연구와
출판, 미술관 전시와 소장, 국제적인 네트워크 형성에 관여한다. 한국 갤러리 역시 판매와 아트페어 참여를 넘어 이러한 역할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기록과 아카이브의 중요성도 커진다. 한국의 작가와
작품에 관한 자료는 미술관과 갤러리, 작가 개인과 유족, 연구기관
등에 분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작품의 제작 시기와 재료, 전시
이력과 관련 비평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는다면 장기적인 연구와 미술사적 평가에 한계가 발생한다.
디지털 아카이브 역시 자료의 정확성을 검증하고 지속적으로 보완하며, 축적된
기록을 비평과 연구로 연결하는 체계가 필요하다.
한국미술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작품의 유통과
판매뿐 아니라, 그 가치를 연구하고 기록하며 장기적으로 축적할 수 있는 전문적인 기반이 필요하다.
문화정책은 시설을 만드는가, 생산 역량을 만드는가
한국의 문화정책은 미술관과 문화시설의 확충, 국제 비엔날레와 아트페어의
개최, 해외 문화기관과의 협력 등을 통해 문화적 인프라를 확대해 왔다.
그러나 새로운 문화시설의 건립과 국제적인 행사 개최가 언제나 한국미술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한 최선의 전략인지는
검토할 필요가 있다.
2026년 부산 퐁피두센터 분관 건립 계획의 철회는 해외 유명 미술관의
브랜드 유치가 지역의 문화적 발전과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남겼다.
문제는 해외의 문화기관이나 성공 모델을 도입하는 일 자체가 아니다. 그
모델이 형성된 역사적 조건과 오늘날 한국의 문화적·제도적 환경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 채 과거의 성공
방식을 미래의 발전 전략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다.
이미 상당한 문화적 기반을 확보한 한국에서는 새로운 시설과 행사의 확대만큼 기존 기관의 전문성과 지속성을 강화하는
일이 중요하다.
미술관의 학예연구 인력, 독립적인 비평과 출판, 작가 연구와 아카이브, 전문적인 보존과 기록, 국제 공동 연구 등은 단기간에 가시적인 성과를 제시하기 어렵지만 미술적 가치가 장기적으로 축적되는 데 필요한
영역이다.
21세기 문화선진국의 조건은 세계적인 문화시설을
얼마나 많이 보유하고 있는가보다, 독자적인 문화적 가치를 얼마나 지속적으로 생산하고 세계와 공유할 수
있는가에 있다.
글로벌 스탠더드 이후, 한국은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
한국 동시대미술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국제 미술계와의 교류를 확대하고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제도와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러한 성과는 세계 미술의 새로운 생산지로 성장하기 위한 중요한 기반이다.
그러나 이제는 국제적인 기준을 얼마나 충실히 수용하고 있는가를 넘어, 그
기준의 형성과 변화에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작가의 독자적인 실천과 비평·연구, 미술관과 비엔날레의 기획과 연구, 갤러리의 장기적인 작가 지원, 아카이브와 출판, 문화정책과 교육의 전문성이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한국이 세계 미술의 또 다른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다. 서구 중심의 미술사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중심을 구축하려는 것은 기존의 위계를 반복할 위험이 있다. 오히려 서로 다른 지역에서 생산된 미학과 지식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세계 미술의 기준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 연재에서 말하는 포스트 컨템퍼러리는 동시대미술 이후에 등장할 새로운 사조나 양식을 확정하는 개념이 아니다. 기존 동시대미술의 가치와 권력, 제도와 담론을 검토하고,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새로운 미술적 실천과 가치가 생산될 수 있는 조건을 탐색하는 관점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미술의 중요한 과제가
세계 미술계에 진입하고 국제적인 인정을 확보하는 일이었다면, 앞으로의 과제는 그 과정에서 축적한 역량을
바탕으로 새로운 미학과 담론, 가치와 기준을 생산하는 일이다.
한국 동시대미술이 지향해야 할 미래는 세계 미술의
또 다른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 미술의 새로운 가치와 기준을 함께 생산하는 주체가 되는 데
있다.
김종호는 홍익대 예술학과 졸업 및 동대학원에서 예술기획을 전공하였다. 1996-2006년까지 갤러리서미 큐레이터, 카이스갤러리 기획실장, 아트센터나비 학예연구팀장, 갤러리현대 디렉터, 가나뉴욕 큐레이터로 일하였고, 2008-2017까지 두산갤러리 서울 & 뉴욕, 두산레지던시 뉴욕의 총괄 디렉터로서 뉴욕에서 일하며 한국 동시대 작가들을 현지에 소개하였다.
2017년 귀국 후 아트 컨설턴트로서 미술교육과 컬렉션 컨설팅 및 각 종 아트 프로젝트를 진행하였으며 2021년 에이프로젝트 컴퍼니 설립 후 한국 동시대 미술의 세계진출을 위한 플랫폼 K-ARTNOW.COM과 K-ARTIST.COM 을 운영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