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서울 국립공보관에서 어느 전시가 강제 철거됐다. 전위예술을 정치 선동으로 간주한 국가 권력이 그 방을 닫았다. 남은 것은 몇 개의 신문 기사와 작가의 노트, 기억의 파편뿐. 한국 여성 작가 정강자가 시도한 첫 번째 환경 작업 〈무체전〉의 이야기다. 리움미술관은 이 사라진 방을 56년 만에 다시 세웠다.
 
리움미술관에서 개막한 기획전《다른 공간 안으로: 여성 작가들의 공감각적 환경 1956–1976》은 이렇게 사라진 작품과 잊힌 이름을 복원하는 자리다. 그러나 이 전시를 단순히 “잊힌 여성 작가들을 소개하는 전시”로 규정하는 것은 부족하다. 더 정확히는, 사라지기 쉬웠던 하나의 예술 형식 자체를 다시 묻는 전시이기 때문이다.
 
 
 
'환경'이라는 예술, 그 소실의 역사
 
'환경 예술’(ambiente)은 관람자가 작품 안으로 들어가 온몸으로 경험하는 체험형 작업이다. 특정 전시에 맞게 설치되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남아 축적되지 않고, 전시가 끝나면 해체되어 사라지는 일회성 성격을 지닌다. 벽에 걸 수도, 좌대에 올릴 수도, 팔기도 어려운 이 예술 형식은 제도 미술의 문법 바깥에 있었다.


리움미술관의 국제기획전《다른 공간 안으로: 여성 작가들의 공감각적 환경 1956-1976》 최초 기획자인 안드레아 리소니(Andrea Lissoni) 하우스 데어 쿤스트 예술감독(왼쪽에서 두번째), 마리나 푸글리에세(Marina Pugliese) 밀라노 MUDEC 관장(오른쪽에서 두번째), 그리고 김성원 리움미술관 부관장(맨 오른쪽) / 사진: 뉴시스

전시를 처음 기획한 안드레아 리소니 하우스 데어 쿤스트 예술감독과 마리나 푸글리에세 밀라노 MUDEC 관장은 "환경 예술의 역사는 곧 파괴와 소실의 역사"라고 표현했다. 당시 작업들은 보존하기 어려운 실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기에 여성 작가들은 미술사와 환경 예술의 역사 양쪽 모두에서 잊히거나 지워지는 이중의 소외를 겪었다.
 
역설적이게도, 제도 미술의 중심에서 비켜있던 여성 작가들에게 이 조건은 오히려 자유로운 발상을 실험하는 해방의 공간이 되었다. 그러나 회화와 조각 중심으로 쓰인 남성 중심 미술사에서 이들의 작업은 금세 잊혀졌다.
 
 
 
4년의 포렌식 복원, 뮌헨에서 서울까지
 
이번 전시는 2023년 뮌헨 하우스 데어 쿤스트에서 기획되어 로마 국립 21세기 미술관(MAXXI), 홍콩 M+로 순회하며 확장되어온 국제 프로젝트다. 각 도시를 거치며 변형되고 보강된 이 전시는 서울 리움미술관에서 가장 확장된 형태로 완성된다.
 
리움은 사라진 역사를 되살리기 위해 4년 넘게 전 세계의 서신과 도면, 비평 기사를 추적하는 “포렌식 복원” 과정을 거쳤다. 안드레아 리소니 감독은 이 과정을 “창작이라기보다 수사에 가까운 일”이라고 표현했다.
 
생존 작가와는 직접 대화하고, 작고 작가의 작업은 유족과 자료를 통해 맞춰가는 방식이었다. 원본을 고스란히 되돌린다는 의미의 복원이 아니라, 복원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견디는 복원이었다.
 
전시는 1956년 일본 구타이 미술전에서 소개된 야마자키 츠루코의〈빨강〉부터 1976년 제37회 베니스 비엔날레 “환경/예술”까지 약 20년을 다루며, 주디 시카고, 리지아 클라크, 라우라 그리시, 알렉산드라 카수바, 정강자, 레아 루블린, 마르타 미누힌, 타니아 무로, 난다 비고, 야마자키 츠루코, 마리안 자질라 등 여성 작가 11인의 환경 작업이 실물 크기로 재구성됐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공간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시선을 붙잡는 것은 알렉산드라 카수바의 〈스펙트럼 통로〉다. 여러 가지 도형을 한데 섞어놓은 듯 유연하게 휘어진 구조 안에서 다양한 색의 빛이 겹겹이 퍼지며 공간을 채운다. 구조물에 들어간 관람객은 이동에 따라 달라지는 빛과 구조를 직접 체험하며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다.


알렉산드라 카수바의〈스펙트럼 통로〉는 나일론 천과 네온 조명을 활용해 삶의 여정을 의미하는 무지개 빛깔 통로를 구현한 구조물이다. 사진/ 리움미술관

주디 시카고의〈깃털의 방〉은 곡면으로 처리된 흰색 공간 안을 수십 킬로그램의 거위 털로 채웠다. 관람객은 무릎까지 올라오는 거위 털 공간을 거닐며 구름 위를 걷는 듯한 비현실적 감각을 체험하게 된다. 단단한 금속과 구조를 중시하던 남성 중심 미니멀리즘에 대한 대응으로, 부드럽고 따뜻한 재료를 통해 공간의 감각을 전복한 작업이다.


큰 방 안을 깃털로 채운 주디 시카고의〈깃털의 방〉. / 사진: 리움미술관

야마자키 츠루코의〈빨강〉은 바닥에서 70cm 떨어진 틈으로 몸을 낮춰 들어가야 하는 붉은 구조물이다. 마르타 미누힌의〈뒹굴고 살아라!〉는 매트리스로 만든 유희적이고 도발적인 공간이며, 라우라 그리시의〈남동풍〉앞에서는 실제 바람이 관람객을 밀어낸다.
 
레아 루블린의〈테라노타스〉는 색채 있는 투명 비닐을 활용해 여성의 생리적인 공간인 “질의 통로”를 형상화한 작품으로, 관람객이 직접 그 속을 체험하도록 설계되었다. 특히 비닐 구조물 내부에 놓인 어린아이의 티셔츠는 소멸과 철거의 역사를 넘어선 '생명'의 경이로움을 이야기한다.


각 작가들의 전시작품 / 사진: 리움인스타그램 캡처화면

이번 전시의 백미: 〈무체전〉과 〈드림 하우스〉
 
이번 전시의 백미는 한국 실험미술의 선구자 정강자 작가의〈무체전〉복원이다. 1970년 정부에 의해 강제 철거된 이래 56년 만에 부활한 이 작품은 리움의 세밀한 고증과 현대 기술이 만난 결과물이다.
 
작가의 생전 육성이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리움은 유족의 음성 데이터를 바탕으로 AI 기술을 통해 작가의 목소리를 재현해냈다. 검은 장막 속에서 울려 퍼지는 작가의 목소리는 60년 전의 전위 예술을 현재의 살아있는 형식으로 탈바꿈시킨다.


정강자의〈무체전〉. / 리움미술관 제공

리움미술관은 이번 전시를 위해 마리안 자질라, 라 몬테 영, 최정희가 함께 작업한 환경 작품〈드림 하우스〉를 아시아 최초로 공개한다. 빛과 소리, 공간이 결합된 이 작품은 관람객이 머무는 시간 자체를 작품의 일부로 끌어들인다.
 
 
 
보테가 베네타와 리움, 세 번째 파트너십
 
보테가 베네타와 리움미술관 간 협업은 2023년 강서경의《버들 북 꾀꼬리》, 2025년 피에르 위그의 《리미널(Liminal)》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다. 1966년 이탈리아 베네토주 비첸차에서 설립된 보테가 베네타는 브랜드 탄생 초기부터 건축, 디자인, 무용, 음악, 시각예술 등 여러 분야의 예술 활동과 유대감을 형성해 왔다. 보테가 베네타 관계자는 "탁월함에 대한 추구, 공동체적 가치, 그리고 수공예에 대한 독창적이고 진취적인 접근을 구현하는 작업을 지지한다"며 "분야와 지역을 초월한 대화가 중심이 되는 프로젝트를 지원함으로써 더욱 넓은 예술 지형 형성에 기여하고 있다"고 전했다.
 
패션 하우스의 문화 후원이 종종 브랜드 이미지의 연장선으로 읽히는 시대에, 이 파트너십은 단순한 스폰서십을 넘어선다. 수공예와 장인정신을 브랜드의 핵심으로 삼아온 보테가 베네타의 가치가, 잊힌 여성 작가들의 수작업 기반 환경 예술을 복원하려는 이 전시의 지향과 맥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미술관이 살아있는 장소가 되는 순간
 
김성원 리움미술관 부관장은 "환경 예술을 봉인된 역사적 장르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살아있는 형식으로 거듭나게 하는 전시"라며 "전문적이고 미술사적으로도 의미가 크면서 동시에 대중적인 프로젝트"라고 소개했다.
 
이 전시가 제기하는 질문은 결국 하나다. 미술관은 무엇을 보존하고 무엇을 복원하는가. 팔리지 않고, 전시가 끝나면 사라지며, 기록조차 희박한 작업들. 그 작업들이 여성 작가의 것이었기에 더 빠르게 지워졌다면, 지금 이 복원은 단순한 역사적 행위가 아니다. 오늘의 미술관이 무엇을 가치 있다고 여기는가에 대한 선언이기도 하다.
 
사라진 방들이 돌아왔다. 56년의 시간을 건너, 다시 열린 이 공간 안으로 들어가 보길 권한다.

 
 
전시 정보
 
- 전시명:《다른 공간 안으로: 여성 작가들의 공감각적 환경 1956–1976》
- 장소: 리움미술관 아동교육문화센터,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55길 60-16
- 기간: 2026년 5월 5일 — 11월 29일
- 후원: 보테가 베네타, KB금융그룹
- 홈페이지: https://www.leeumhoam.org/leeum